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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자료)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5㎝ 이동에 5분' 홀로서기 첫 발…'일상홈'서 인생 2막 연다
등록일 2018-06-01 오전 11:48:43 조회수 1245
E-mail wdg3@naver.com  이름 관리자

[누구나 장애인이 될 수 있다] '5㎝ 이동에 5분' 홀로서기 첫 발…'일상홈'서 인생 2막 연다

5㎝. 휠체어와 침대의 간격은 겨우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였다. 지난 14일 서울 영등포구 도림동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강별(24·여)씨는 5㎝를 건너가기 위해 휠체어에 올린 팔에 힘을 줬다 풀기를 수차례 반복했다. 고정한 휠체어가 움직이자 곁에 있던 ‘코치’가 재빨리 휠체어를 붙잡았다. “도와줄까?” 초조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아버지 강경유(60)씨가 말을 건넸지만, 강씨는 “괜찮다”며 숨을 골랐다. 침대 옆 서랍장에 머리를 기댄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면서 팔로 조금씩 몸을 밀었다. 휠체어를 잡은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마침내 강씨의 몸이 침대로 넘어갔다. 침대 위에 앉은 강씨는 힘이 든 듯 숨을 몰아쉬었지만 표정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 운영하는 ‘일상홈’에 입소한 강별씨가 휠체어에서 침대로 이동하는 ‘트랜스퍼’ 훈련을 하고 있다. 한국척수장애인협회 제공

이곳은 한국척수장애인협회에서 운영하는 ‘일상홈’이다. 일반 가정집처럼 꾸며진 일상홈은 중도 척수장애인이 사회로 나가 생활할 수 있도록 일상행동들을 ‘훈련’하는 곳이다. 이곳에 입소한 척수장애인은 한 달간 화장실 이용, 옷 입기, 장 보기 등 스스로 생활하는 법을 배운다. 1년에 이곳을 거쳐가는 척수장애인은 8명. 강씨는 지난 3일 20번째 입소생이 됐다. 

‘줄탁동시(啐啄同時)’. 강씨는 자신을 알에서 깨어나려는 병아리에 비유했다. 2013년 교통사고로 척수장애인이 된 그는 “휠체어에 앉으면 세상이 달라진다”며 “모든 것을 새롭게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강씨는 입소 3일 만에 휠체어에서 침대로 혼자 몸을 옮기는 ‘트랜스퍼’에 성공했다. 2년 6개월간에 병원 생활에서는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일이다. 아직도 5㎝ 간격을 건너는 데 5분 정도가 걸리지만, 스스로 하는 법을 하나씩 깨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강씨는 “지금까지는 아침마다 부모님이 침대에서 휠체어로 옮겨줬는데, 이제는 집에 가도 혼자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며 웃었다.  

경추(목등뼈) 5·6번 디스크를 다친 강씨는 하반신은 전혀 사용하지 못한다. 팔도 삼두근 일부만 사용할 수 있어 힘이 부족하고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한다. 강씨는 “병원에서 알게 된 척수장애인이 일상홈을 추천했지만 처음엔 겁이 나서 신청할 엄두를 못 냈다”고 말했다.   


사고 이후 부모님의 보호 속에서 지내다 보니 혼자 생활하는 법을 배울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2년6개월가량의 병원 생활을 마치고 돌아간 집은 모든 것이 불편했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보니 주로 집에서 TV를 보거나 인터넷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동네 장애인 복지관에 가봤지만 이용자가 많아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했다.‘계속 이렇게 살아선 안 되겠다’는 생각에 용기를 냈고, 마침내 일상홈의 문을 두드렸다. 


요즘 강씨에게는 일상의 모든 것이 새롭다. 사고 후 처음으로 혼자 머리를 감았고, 마트에 갔다. 팔 힘이 부족해 칼질하는 법도 새로 배워야 했지만 최근에는 오이소박이도 만들었다. 가장 열심히 하는 것은 운전연습이다. 얼마 전 처음 핸들을 잡은 강씨는 “생각보다 핸들이 무거웠다”면서도 “빨리 면허시험에 합격해 두 다리 대신 네 바퀴로 여기저기 가보고 싶다”며 웃었다.  


일상홈이 준 가장 큰 변화는 ‘자신감’이다. 훈련을 돕는 일상생활 코치는 세세한 요령을 설명해 주지만 되도록 강씨가 스스로 해내도록 유도한다. 강씨의 아버지는 “일상홈에 들어온 다음 딸의 성격도 많이 변했다”며 “일상에 자신감이 붙고 이제는 공부와 진로도 고민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변한 것은 가족들도 마찬가지다. 강씨의 아버지는 “항상 도와주다 보니 딸이 얼만큼이나 혼자 할 수 있을지 몰랐다”며 “딸을 보며 우리도 많이 배우고 있다”고 덧붙였다. 

일상홈을 거쳐간 이들은 이곳의 훈련을 ‘비장애와 장애를 연결하는 다리’라고 말한다. 2015년 일상홈 교육을 마친 이모(35·여)씨는 “일상홈에서 선배 장애인의 조언을 들으면서 장애를 받아들이고 자신감도 생겼다”며 “장애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인생의 굴곡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개소 후 이곳을 거쳐간 이들은 대부분 사회에 성공적으로 복귀했다. 취업에 성공한 사람도 많다.  


그러나 내년부터는 일상홈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척수장애인협회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후원으로 3년 전부터 아파트를 임대해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지만, 후원은 올해 10월 종료된다. 후원이 끊기면 훈련장소를 마련할 수가 없다.  

척수장애인협회 장애인식개선교육센터의 김세윤 대리는 “일상홈은 중도 척수장애인에게는 꼭 필요한 사회재활 프로그램”이라며 “사회와 고립된 중도 척수장애인들을 위해 사업이 계속 이어졌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협회는 정부에 예산 지원을 요구할 계획이다. 이찬우 척수장애인협회 사무총장은 “일상홈은 병원을 나온 척수장애인들이 지역사회로 안착할 수 있는 중간시설로, 조기 지역사회 복귀에 커다란 힘이 된다”며 “정부가 일상홈의 중요성을 깨달아 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창훈·김유나 기자 corazon@segye.com 
사진=한국척수장애인협회 제공